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교쿠 덴노 (문단 편집) == 백제 부흥군을 돕다가 죽다 == 타카라가 사이메이 덴노로 재즉위한 시절, 68세라는 고령의 나이에, [[김유신]]을 필두로 한 [[나당연합군]]이 [[백제]]와 맞붙어 [[황산벌 전투]]에서 백제군이 전멸하고 더군다나 그렇게 믿었던 [[계백]]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백제]]가 군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해왔다. 그들이 우리에게까지 지원 요청을 한 것을 보면 나라가 망하여 의지할 곳도 호소할 곳도 없다는 뜻이다. '''그들의 위태로운 상황을 돕고, 백제의 끊어진 왕통을 잇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거리에서 산속에서 창을 베개 삼아 싸우며 쓸개를 먹는 것과 같은 참담한 상황이니 그들의 이 절박한 뜻을 저버릴 수는 없는 일. 여러 장군에게 명하노니, 백제를 위해 출병하라. 구름처럼 번개처럼 백제 땅으로 진격해 그 원수를 쳐서 백제의 긴박한 고통을 덜어주리라. 백제는 왜국([[야마토]])에 조력을 요청했고, 사이메이 덴노는 이에 응했다. 《[[일본서기]]》는 '''[[백강 전투|백강구 전투]]''' 파병의 동기를 '복신의 뜻에 따라'라고 적고 있는데, [[귀실복신]]은 백제 부흥군의 총대장이었다. 또 《구당서》에는 >'부여풍지중'...'당시 일본군은 부여풍의 무리다' 라고 적는 등 백제 지원을 위해 참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야마토]]에 머물러 있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백제로 돌려보내 [[백제부흥운동]]의 수장으로 옹립되도록 도와주고 병력 파병을 약속했다. 661년 2월 사이메이 덴노는 현재의 [[나라현]]에 해당하는 혼슈의 야마토국(大和国)의 수도에서 육•수군을 이끌고 출발하여 [[세토내해]]를 가로질러 현재의 에히메현에 해당하는 [[시코쿠]]의 이요국(伊予国) 니키타진(熟田津)의 임시 행궁인 이와유노카리미야(石湯行宮)에 정박했다가 5월에 현재의 [[후쿠오카현]]에 해당하는 [[규슈]]의 츠쿠시국(筑紫国)의 임시 행궁인 아사쿠라노타치바나노히로니와노미야(朝倉橘広庭宮)에 도달했다. 황태자인 나카노오에 황자와 문무백관들도 같이 따라왔다는 것으로 보아 거의 천도 레벨이었다. 당시 사이메이 덴노의 나이는 68세의 고령이었고, 천황은 성공을 비는 의식도 행했다고 전해진다. 이와 별개로 외세의 침공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일본 역사상 최초로 외세 방어 목적을 위한 요새들을 건설했다. 당시 야마토는 백제와 긴밀한 사이였던지라 백제가 멸망하면 나당연합군이 자국으로 쳐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었다. >니키타스에서 배를 타려고 달이 뜨기를 기다린다. 마침 둥그런 달이 떠서, 물때도 딱 알맞구나. 자, 지금 저어 나가자. 사이메이 덴노가 출전을 앞두고 지은 시다. 이는 사이메이 덴노의 파병 의지가 매우 강했음을 보여준다. 661년 8월 사이메이 덴노가 아사쿠라노타치바나노히로니와노미야에서 붕어했다. 그녀의 유체는 일단 11월에 현재의 오사카부에 해당하는 나니와진(難波津)으로 옮겨졌다가 12월에 다시 수도의 궁전인 아스카노카와라노미야(飛鳥川原宮)로 옮겨져 치러졌다. 아무리 고령이라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지만 당대부터 죽음에 논란이 많았다고 하며, 시해당했다는 소문도 돌았다고 한다. 실제로 대왕(오키미)이 나라 기둥을 뽑아낼 정도로 무리해서 아스카를 버리고 후쿠오카까지 천도나 다름없는 짓을 했으니 논란이 안 되었을 리가 없다. 일반적으로 이런 상황이 되면 파병을 그만두지만, 나카노오에 황자는 즉위식을 몇 년이나 미루면서까지 우선 지원 병력부터 보냈다. 오미 신궁에는 [[덴지 덴노]]가 직접 만든 해시계가 봉안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백촌강, 즉 백강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나카노오에 황자(본명 카즈라기)는 [[조메이 덴노]]와 고교쿠 덴노(사이메이 덴노)의 아들이었는데, 아버지인 조메이 덴노부터 [[아스카]]에 있는 [[소가]] 일대([[소가]]씨의 기원이자 본거지) 바로 북쪽에 있는 [[백제]](百濟)를 본거지로 두고 지낼 정도로 백제인들과 가까운 천황이었다. 그렇게 야마토(왜) 군대는 백제 부흥군과 합세하여 서기 663년 8월, 나당연합군과 백강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대패하여 깡그리 몰살당했다(...). 《일본서기》에서는 '''하쿠스키 강(白村江, 백촌강) 전투'''라고 부른다. 백촌강은 [[금강]](내지는 금강의 지류나 하류)의 이명으로 비정되는데, 지금도 금강 하류인 [[부여군]]과 [[서천군]]의 주민들이 금강을 '백마강'(白馬江)이라고 부르는 데서 관련성을 유추할 수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오르고 바닷물도 붉은 빛을 띠었다" 고 한다. 왜국은 전국 병력의 절반 이상을 잃고, 패닉 상태가 되었다. 결국 이 결과물로 백제는 완전히 멸망했다. 이후 나카노오에 황자는 즉위식을 치루고 [[덴지 덴노]]가 되었다. 이 때 나라를 잃은 많은 백제 유민들이 일본 열도로 이주해 이들이 살 곳이 마련되어졌다고 하며, [[헤이안 시대]]가 처음 들어설 때까지도 백제인은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조정내에서 세력을 이뤘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